스티브잡스에 대한 몇 가지흥미로운 이야기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읽는다면, 스티브 잡스가 그렇게 유명하게 혁신한 많은 제품들 중 하나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1955년 2월 24일 태어난 이 기술 천재는 개인용 컴퓨터의 외관과 느낌의 기준을 세웠다.
잡스는 1976년 애플을 공동 창업한 뒤 1985년 강제 퇴출됐다가 1996년 CEO로 복귀했다. 그는 2011년 신경내분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계속 브랜드의 얼굴이었다. 잡스가 없다면 현대 세계의 유비쿼터스 기술은 매우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며, 기계 뒤에 있는 사람은 매혹적일 정도로 복잡한 인물이었다. 여기 당신이 몰랐을지도 모르는 스티브 잡스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스티브 잡스가 입양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매우 공적인 인물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항상 그의 사생활을 감추기 위해 조심했다. 잡스는 입양되었고, 그의 친아버지 압둘파타 잔달리는 시리아 이민자였다. 그는 얀달리의 연락을 거부했고, 그의 딸 리사의 친자 관계를 수년간 부인했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 중퇴자였다.
대학 학위가 직업적 성공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도록 하라. 잡스는 노동자 출신이어서 리드 칼리지가 가족에게 주는 재정적 부담으로 6개월 만에 중퇴했다. 흥미롭게도, 잡스는 수십 년 후에 그가 리드 대학에서 들었던 서예 수업이 맥 컴퓨터에서 사용된 최초의 타이포그래피에 영감을 주었다고 밝혔다.
스티브 잡스는 직원들이 회사 유니폼을 입고 싶지 않아 그의 시그니처인 검은 터틀넥을 입기 시작했다.
잡스의 잘 알려진 패션으로 애플 제품 디자인의 날렵함이 그대로 번역됐다. 잡스의 대다수의 사진은 청바지와 운동화가 짝을 이룬 검정 터틀넥을 입은 모습이다. 그는 어떤 검은 터틀넥도 입지 않았다. 그 유명한 상의는 일본의 혁신적인 디자이너 미야케 이세이(Issey Miyake)의 것이었다.
잡스는 원래 80년대에 소니의 도쿄 본사를 방문했을 때 소니 직원들이 입었던 미니멀리스트 미야케가 디자인한 유니폼에 감탄했다. 잡스는 실제로 미야케에게 애플용 유니폼 디자인을 의뢰할 정도로 유니폼을 사랑했지만 애플 직원들은 그 생각을 싫어했다. 잡스는 미야케 터틀넥의 시그니처 채택으로 타협했다. 그중 100여 개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가 입은 스타일은 사망 후 단종된 반면 미야케는 나중에 패션 인플루언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비슷한 검정 터틀넥을 출시했다.
스티브 잡스는 당신이 예상할 수 있는 기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술의 세계를 변화시켰지만, 그의 동료들에게 잡스는 그의 기술력보다 그의 사업 지식과 창의성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하고 1985년 물러난 스티브 워즈니악은 "그는 기술을 몰랐다. 그는 하드웨어 기술자로서 어떤 것도 디자인한 적이 없었고, 소프트웨어도 몰랐다. 그는 중요해지고 싶었고, 중요한 사람들은 항상 비즈니스맨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야."
스티브 잡스의 초기 컴퓨터는 최근 거의 5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1976년 산 컴퓨터가 오늘날에도 작동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지만, 애플사의 첫 데스크톱 모델인 희귀한 애플-1(원래는 666.66달러에 팔렸다)이 최근 크리스티의 작업환경에서 경매에 나왔다. 부피가 크고 70년대의 이 기계는 익명의 구매자에게 약 47만 달러에 팔렸다.
스티브 잡스는 60년대 뮤지컬 아이콘과 데이트를 했다.
아내 로린 파월을 만나기 10년 전인 1982년 잡스는 포크 가수 조안 배즈와 사귀었다. 잡스는 이들의 관계를 "연인이 된 두 우연한 친구 사이의 진지한 관계"라고 설명했다.
배즈는 밥 딜런과 데이트를 하고 60년대와 70년대에 그와 함께 공연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침 잡스 역시 딜런의 열렬 한 팬이었다. 잡스와 워즈니악은 원래 이 다작 아티스트를 위해 팬덤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했고, 그의 앨범들을 수집했다. 잡스는 2004년에 마침내 그의 음악적 영웅을 만났지만, 그들의 대화 주제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가 환각제 실험을 했다.
많은 부머 세대들처럼 잡스도 젊은 시절에는 히피 같은 존재였다. 그와 그의 친구이자 미래의 직원인 대니얼 코트케는 70년대에 대학 시절에 LSD를 자주 하곤 했다. 코트케는 자신과 잡스를 "monk-wannabes"라고 묘사했다. 잡스는 영적 스승 람 다스의 1971년 명상에 관한 책인 'Be Here Now'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선불교를 실천했다. 마음가짐의 불교적 원칙은 심지어 애플의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제품 디자인을 고무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스티브 잡스는 '지니어스 바'라는 개념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애플 스토어는 반짝이는 화이트 미학과 고객 서비스용 '지니어스 바'로 유명하다. 그러나 모든 상점들이 잡스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2000년에 애플은 론 존슨을 고용하여 그들의 첫 번째 소매점을 운영했다. 존슨은 '지니어스 바'를 만들 책임을 지고 잡스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때 그것을 "멍청한"라고 부르며 "Ron, 당신은 올바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과 연결하는 방법을 아는 기술을 아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괴짜입니다! Geek Bar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스티브 잡스는 오리지널 아이폰이 주로 폰으로 사용되기를 원했다.
아이폰이 휴대폰을 영원히 바꿔 기능성이 뛰어난 미니컴퓨터로 만들었고, 문자 메시지와 소셜미디어 통합이 용이해 사용자들이 전화 통화를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의 아이폰이 원래 그것, 즉 전화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이 제품을 소개하는 2007년 기조연설에서 잡스는 "우리는 전화기를 재발명하고 싶다. 킬러 앱이 뭐야? 킬러 앱이 전화를 걸고 있다. 웬만한 전화로는 전화를 걸기가 얼마나 힘든지 놀라울 정도라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말은 "오 와우. 오, 와우. 아이고."
잡스는 20대가 되어서야 친동생인 모나 심슨을 만났다. 소설가 심슨은 잡스의 장례식에서 그들의 독특한 관계를 묘사하고 암 투병 중 마지막 날들을 기억하며 찬사를 보냈다. 연설 말미 심슨은 "오 와우. 오 와우. 오 와우"라는 간결하면서도 가슴 아픈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오빠가 평화롭게 죽었다고 말했다.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롬 확장 프로그램 추천 - Momentum, One tap, Google 번역 (0) | 2021.03.13 |
---|---|
변기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5마리의 동물들 (0) | 2021.03.11 |
윈스터 처칠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 (0) | 2021.03.09 |
킹콩에 대한 몇가지 큰 사실들 (0) | 2021.03.07 |
비행기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10가지 (0) | 2021.03.05 |